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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불교 창시, 상징, 종지와목적, 교리, 초기공동체, 법인성사, 대성지

by 개구리5412 2023. 4.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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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창시

-1916 년 (원기  1 년 ) 4 월  28 일 , 소태산 박중빈 대종사의 큰 깨달음 (大覺 )을 계기로 시작된 종교입니다 .

-소태산 박중빈 대종사는  ‘세계가 물질문명의 발달로 인해 인류의 정신문명이 약해질 것을 예견 ’하고 정신문명을 이끌어나갈 새 시대 새 종교인 원불교를 열었습니다 .

-원불교는 해방 이후 전재동포구호사업을 전개했고 , 한국 전쟁 당시 국내 최초의 고아원인 한국보육원을 설립하여 운영하고 있으며 , 원광대학교 설립 , 원음방송 개국 , 군종장교 승인 , 국장 영결식 종교의식 거행 등을 통해 한국의  4 대 종교로서 활동하고 있으며 , 국내뿐 아니라 해외  23 개국에 진출해 세계보편종교로 성장해 가고 있습니다 .

 

2. 상징

-일원상 [一圓相 ] : 상징적 표현으로 부처님이나 하나님 , 진리 , 도 , 태극과 같은 궁극적 진리를 가리킵니다 . 말로 표현하면 일원상이요 형상으로 표현하면 둥그런 원으로 , 우주 만유의 본원이며 모든 성자들의 마음이며 , 모든 중생의 본래 청정한 마음으로 우주만유의 생성 변화를 주재하지만 볼 수도 들을 수도 만질 수도 없습니다 .

-우주만유의 본원이며 모든 성자들의 마음이며 , 모든 중생의 본래 청정한 마음으로 소태산 대종사께서는 이를 둥그런 일원상으로 그려 주시며 마치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과 같다고 비유해 주셨습니다 . 따라서 모든 원불교인들은 이 일원상 진리를 닮아가기 위해 정진 적공하고 있습니다 .

 

3. 종지와 목적

가 . 종지 [宗旨 ]

우주만유의 본원이요 , 제불제성의 심인이며 , 일체중생의 본성인 법신불 일원상의 진리를 종지로 합니다 .

나 . 목적 [目的 ]

종지 아래 진리적 종교의 신앙과 사실적 도덕의 훈련으로써 일체중생을 광대무량한 낙원으로 인도함을 목적으로 합니다 .

 

4. 교리

가 . 사은 (四恩 ) : 나의 마음이 곧 부처이고 우주의 모든 존재가 부처임을 믿어서 천지 , 부모 , 동포 , 법률의 은혜에 보은하고 감사하는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  

나 . 사요 (四要 ) : 세상을 구원하고 인류 사회를 발전시켜 이상적인 평등 세계를 만들기 위하여 , 스스로의 힘을 기르는 자력양성 (自力養成 ), 지혜를 키우는 지자본위 (智者本位 ), 후세대를 교육하는 타자녀교육  (他子女敎育 ), 공공을 위해 복무하는 사람에 대한 공도자숭배 (公道者崇拜 )를 구체적인 가르침인 것입니다 .  

다 . 생활속에서 불공  : 법신불 사은전에 심고를 올리고 기도하는 것을 진리불공이라 하고 , 이 세상 모두가 부처님이니 우리에게 죄복을 주는 직접적인 권능이 있음을 믿고 , 항상 공경하고 받드는 것을 실지불공이라 합니다 . 그러므로 우리가 복을 빌거나 죄를 참회할 때에는 먼저 법신불 사은전에 심고나 기도를 하고 , 아울러 내가 대하고 있는 모든 사람과 사물을 부처님 모시듯 대해야 합니다 .

 

5. 초기 공동체

-깨달음을 얻은 뒤 박중빈 대종사의 고향인 전남 영광을 중심으로 초기 공동체를 모았다 . -1916 년 영광군 길용리에서 불법연구회를 조직하여  9 인을 규합한 것이 최초의 공동체로 이들은 방언조합이라는 저축조합을 함께 운영하였다 .

-1920 년 영광군 묘량면 신흥마을에 수신조합을 세워 공동체를 확장하였으며 , 신흥의 수신조합 역시 상조조합을 겸하여 경제적으로 공동체를 형성하였으며 , 야학 등의 교육사업으로 마을 주민들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또한 초기 공동체는 영광지역에서 간척사업을 확대하고 있었으나 , 조선총독부의 신흥종교 감시대상이 되었다 . 박중빈 대종사는 체포되어  1 주일간 구금된 뒤 석방되었고 영광을 벗어나 전국적인 종교로 확장하기로 마음 먹었고 , 전주를 비롯한 여러 곳을 총부의 후보지로 물색하다가 익산에 총부를 세우게 되었다

 

6. 법인성사

가 . 소태산 대종사     나 . 정산 송 규       다 . 일산 이재철     라 . 이산 이순순      마 . 삼산 김기천      바 . 사산 오창건   사 . 오산 박세철         아 . 육산 박동국    자 . 칠산 유 건        차 . 팔산 김광선

 

7. 대성지

-소태산 대종사의 탄생 , 구도 , 대각 및 제중사업 등 교단 .창립과정에 관련된 터와 구조물이 밀집되어 있는 특정지역을 말합니다 .  

가 . 영산 대성지

성지가 위치한 백수라는 지명은 백에서 일을 떼어버린 아흔아홉의 묏부리를 뜻한다고 합니다 . 지명이 말해주듯 백수는 구수산의 많은 산봉우리가 어우러져 이루어진 해안 산간 지역입니다 . 바닷물이 깊숙이 내륙까지 들어오던 시절에는 구수산 삼면이 물에 잠겨 섬 모양을 이루었다 하며 , 간척 사업이 이루어지기 전만 하여도 내륙  10 여 Km 까지 배가 드나들었다고 합니다 .

길용리는 법성포에서 뱃길로 약  4km  서해의 바닷물이 와탄천을 따라 은선암과 매바위 (안암 ) 밑을 굽이쳐 길용리로 돌아드는데 이 물줄기가 선진포를 거슬러 위로 십여 리 올라갑니다 . 와탄천은 멀리 대마의 태청산 , 묘량면의 정암산 골짜기에서 흐르는 무장천과 영광읍의 수퇴산에서 흐르는 도편천이 합류하여 덕호리를 거쳐 법성 앞바다에 이르는 하천으로 영광에서 제일 큰 하천입니다 .

옛날 길용리 사람들은 구수산에서 땔나무를 하거나 숯을 구워 와탄천을 내왕하는 조수를 따라 뱃길로 법성포에 내다 팔고 생필품 등을 구입해 오기도 하였습니다 . 육로가 불편한 당시로는 와탄천은 길용리 사람들에게는 생활의 젖줄이었고 문물의 통로였습니다 .길용리는 산기슭에 자리 잡은 여러 마을로 이루어집니다 . 옛날 사찰이 있었다는 데서 연유한 수도암 , 무운암 그리고 입석골 , 지금은 길룡저수지가 되어 버린 마계촌 , 귀룡 모양의 바위가 있다는 용암 마을을 비롯하여 잠실 , 구호동 , 영촌 , 범현동 등의 아홉 마을이 있습니다 . 구호동은 아홉 호랑이 노루목의 노루를 보고 달려드는 형국이라고 붙여진 이름이고 범현동은 돛대 모양이라 하여 범현동이라 하였습니다 .

길용리는 생활이 빈궁하고 문화적 혜택이 뒤진 곳이기는 하나 기승한 지세로 인하여 큰 인물이 날 것이라는 전설이 끊이질 않았습니다 . 영광은 또한 백제에 불교가 전래될 때 동진의 마라난타가 해로를 타고 법성에 입항하여 불갑사를 세웠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 그리고 구수산에는 팔만구암자가 있었다고 합니다 . 그러나 팔만이란 실제의 숫자라기보다는 많음을 뜻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 현재는 죽사가 있을 따름이고 전골 , 수두암 , 무운암 , 사리암 , 기야암 등의 절 이름이 전해지고 있고 당간 지주를 비롯하여 기와 파편 , 주춧돌 등 옛날의 절터임을 말해 주는 흔적들이 여러 곳에 남아 있는 것을 보면 절이 있었던 것은 사실인 듯합니다 . 이처럼 영광의 길용리는 갖가지 전설과 깊은 불연과 신령한 빛이 어려 있는 땅이다 . 원기  59 년 (1974) 3 월  30 일 중앙교의회 의결에 의해 영산성지사업회가 발족되어 영산성지의 장엄 및 각종 사업을 펼치고 있습니다 .

영산성지에 산재하고 있는 사적으로는 영촌마을에 있는 탄생가 , 대종사 대각 이전 가장 많이 사셨던 구호동 집터 , 산신령을 만나려고 기도드렸던 마당바위 , 한나절이나 서서 입정에 들었던 선진포 , 대각을 이룬 노루목 대각지 , 최초의 법어를 설한 돛드래미 이씨제각 , 최초 교당인 구간도실 터 , 9 인 제자들의 정성이 깃든 구인 기도봉 등의 사적지가 있으며 현재 원불교 중앙총부 영산사무소와 원불교영산대학 , 영산성지고등학교 등이 있습니다 . 참고로 여기서 소개한 성지의 자료는 전치균교무의  [원불교 성지 변천 과정 ]이라는 자료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  

 

나 . 변산 대성지

변산 제법성지는 대종사가  5 년간 기거하며 교법을 반포한 곳입니다 . 교법을 반포한 봉래정사 (蓬來精舍 )는 전북 부안군 변산면 중계리에 있으며 국립공원 변산반도의 중앙에 있습니다 . 변산반도는 해안 쪽을 외변산 , 내륙 쪽 골짜기를 내변산이라고 하는데 변산 제법성지 사적지들은 내변산에 있습니다 .

대종사는 혈인기도를 마치고 원기  4 년  (1919) 10 월 변산에 들어가서 교법을 제정하고 교단 초기 인연들 특히 익산 총부 (현 중앙총부 ) 건설의 인연들을 만나면서 원기  9 년 (1924) 5 월까지 기거한 곳입니다 . 봉래정사의 변화의 주된 과정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

대종사는 일찍부터 새 회상 창립의 준비를 위한 휴양처를 물색하여 원기  4 년 (1919) 3 월에 오창건을 데리고 전라북도 부안 봉래산 (변산 ) 월명암에서  10 여 일 머문 후 돌아와 , 7 월 말에는 다시 정산종사를 보내어 미래의 근거를 정하게 하더니  10 월에 이르러 몇 해 동안 수양할 계획에 따라 월명암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이 후 대종사가 월명암에 계신다는 소문이 인근에 퍼지자 전주 , 김제 등지에서 송적벽 등이 달려와 모시기를 원하는지라 그 해 (1919) 12 월 봉래산 중앙지인 실상사 옆 몇 간 초당에 거처를 정하게 하고 몇몇 제자와 더불어 간고한 살림을 하면서 심신의 휴양에 주력하였습니다 .

원기  5 년  4 월에 대종사 봉래산에서 새 회상의 교강을 발표하니 , 인생의 요도  - 사은 사요와 , 공부의 요도  - 삼강령 팔조목이었습니다 .원기  6 년 (1921) 7 월에 김남천 , 송적벽 등의 발의로 실상초당 위편에  3 간 초당의 건축을 착공하여 그 해  9 월에 준공하고 이름을 석두암 (石頭庵 )이라 하였습니다 . 이때에 대종사도 밖으로 승려들과 교제하며 불교 사찰의 모든 법도를 일일이 청취하고 안으로 제자들과 더불어 새 회상의 첫 교서 초안에 분망하였던 것입니다 . 원기  8 년 (1923) 6 월에 서중안 , 동풍 형제가 와서  "교통과 장소가 편리한 곳을 택하여 모든 사람의 앞길을 널리 열어 주심이 시대의 급무일까 하나이다 " 하며 대종사의 하산을 지성으로 간청하였습니다 .

이듬해  4 월  29 일 이리 보광사에서 불법연구회 창립총회를 열어 불법연구회라는 임시 교명으로 새 회상을 내외에 공개하였고 원불교의 교화기지를 이리로 정하고 봉래정사에서 이리로 기거를 옮기자 대종사 떠난 봉래정사를 김남천 일가가 남아  1 년간 수호했습니다 . 이후 원기  10 년부터 이춘풍 일가 , 이보국 내외 , 전종환 등이 차례로 수호 후 , 실상동 주민 고진관 일가에게 위탁하여 수호하였습니다 . 원기  33 년  9 월 오창건 발기로 석두암을 중수하였으나 원기  35 년  10 월  6.25 동란 작전 중 소실되고 말았습니다 이후 교단의 손이 미치지 못하다가 원기  63 년  10 월에는 월명암 주지 정도전 개인사찰  [원광선원 ] 및 부속 임야를 인수하면서 원기  64 년  4 월 원광선원을 하섬수양원 변산 분원으로 발족 , 12 월 변산 제법성지 사업회를 발족하였습니다 .원기  65 년  7 월 봉래정사 석두암 터에 일원대도비를 건립하고 원기  66 년  1 월 봉래수양원으로 기관이 승격되어 원기  66 년  5 월  21 일 대산종사 입석 아래 일원대도비 봉고식을 거행하였습니다 .  

 

다 . 익산 대성지

중앙총부는 익산역에서 대전으로 가는 국도를 따라 북쪽으로  4km  떨어진 국도 변에 자리하고 있다 . 사이에 도로를 하나 두고 교립 원광대학교와 함께  50 만 평의 부지에 세워진 원불교 중앙총부는 전법성지이며 대종사가 친히 건설 후 이곳에서  18 년간 교화를 펴다가 열반에 든 곳이다 .

총부 구내는 사적 유물 관리위원회에서 보존지역으로 지정한 대종사 당시 이루어진 지역과 개교반백년 기념사업을 하면서 확장한 두 지역으로 총  10 만 평의 대지위에 각종 기념물과 건물들이 건립되어 있다 .

원기  9 년  (1924) 3 월에 대종사는 부안 변산에서 교법을 제정하신 후 교화를 펴실 기지로 정읍 내장사를 계획하고 한때 머물면서 여러 가지 상황을 보았으나 이 계획이 원만히 진행되지 않자 다시 전주 완산동 전음광 선생의 집에서 몇몇 제자들을 만났는데 그곳에서 서중안 , 송만경 , 이청춘 , 이청풍 , 문정규 , 박원석 , 전음광 등이 발기인이 되어 불법연구회 창립준비를 논의하였다 . 모임에서 회관건립 장소를 이리로 결정하고 , 대종사는 제자들과 함께 이리 부근을 답사한 후 박원석의 주선으로 이리역에서  4km  떨어진 익산군 북일면 신룡리에 총부 건설 기지를 정하였다 .

마침내 원기  9 년 (1924) 4 월  29 일 이리 보광사에서 창립총회를 개최함으로써 본격적인 총부 건설이 시작되었다 .

원불교 중앙총부가 속해 있는 익산시는 백제면 소력지현 (所力只縣 )이라 했고 , 신라 때는 옥야현 (沃野縣 )이라 개칭했다 . 그 후 통일신라 때에는 금마군 (金馬郡 ), 고려 때에는 익주군 (益州郡 )에 속했다가  1914 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익산군 남일면과 병합하여 익산군으로 되었다 . 1931 년  11 월에 이리읍으로 승격되었으며  1945 년  8.15  조국 광복과 더불어 행정구역 확장과 지방자치법 시행에 따라 이리시로 승격되었다가  1996 년 다시 익산시로 명명되었다 .

중앙총부가 속해있는 북일면은  1973 년  7 월  1 일 이리시 확장에 따라 이리시 (현 익산시 )에 편입되었다 .

처음 원불교 총부가 있던 장소는 익산군에 속해있는 잿배기  [도치 (盜峙 )]재라는 곳이다 . 인가라곤 찾아볼 수 없는 곳으로 칙칙하게 들어찬 솔 숲 사이로 황등 호수가 있었는데 이 호수를 상시연 (上矢淵 ) 또는 요교지 (腰橋地 )라 했다 .

1922 년 대아리 저수지가 준공되면서 황등 호수는  1923 년 없어졌으며 현재 원광대학교가 차지하고 있는 곳이다 . 이 호수 건너편으로 사방이 좀 트인 곳에 거친 잡초가 무성한 황토땅이 있었는데 여기가 바로 현 신룡동  344-2 번지에 해당하는 지금의 총부 자리다 . 이 지대를 이름하여 신룡벌이라 했다 . 이곳에 서중안 선생이  3,945 평의 대지를 구입 희사 함으로써 본격적인 총부 건설이 착수되었으며 이와 함께 각처에서 모인 제자들의 건축 희사금으로 원기  9 년  9 월 공사를 시작  11 월 경에 목조 초가  2 동  17 간을 완공하게 되었다 . 이때부터 전무출신의 공동생활이 시작되었으나 생활방도가 막연하였으므로 회장인 서중안 선생의 주선으로 동양척식회사 소유의 토지 소작 작농을 통해 스스로 공부할 비용을 모았다 .

한편 생활유지 대책이 곤란하여 송적벽 , 문정규 선생 등의 발의로 엿장수를 하면서 엿밥과 아카시아잎 반찬으로 끼니를 이어갔다 . 낮에는 각자 맡은 고된 일을 감당하였다 . 여자 전무출신들은 고무공장 공원으로 일하는 어려움을 겪었다 . 이러한 가운데에도 밤에는 모두 한자리에 모여 그날의 경과를 보고하고 대종사의 법설에 법열이 넘치는 공부 길을 잡아가는 영육쌍전의 산 도량이 되었다 .이렇게 초기 중앙총부의 선진들은 일제의 압박과 경제적 빈곤을 극복하면서 대종사의 일원대도 정법을 전했고 , 또한 이곳은 새 회상의 발전을 위해 힘 기울였던 선진들 희생정신이 스며있는 땅이며 원불교 전법 성지인 동시에 교단의 심장부이다 .동쪽에는 미륵산이 있고 서쪽에는 배산이 있으며 호남평야가 서면으로 펼쳐져 있는데 중앙 총부란 말이 처음 나오는 인쇄물은 월말 통신  28, 29  합간호로 원기  15 년  6 월에 발행되었다 . 서중안의 열반을 당하여 쓴 위령문에서  [불법연구회 중앙총부 근고 ]라 하였다 .

대종사 당시 세웠던 대각전 , 본원실 , 공회당 . 종법실 , 금강원 , 정신원 , 구정원 등과 소태산 대종사 성탑 , 성비 , 정산종사 성탑 , 영모전 등 각종 사적과 유물 , 사료 등이 있고 소태산 대종사의 유품 등이 소태산 기념관과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한편 , 지난  86 년  3 월에 총부 재정산업부에선 장기 종합개발계획안이 마련되어 총부의 성지 성역화 작업이 개교 백주년 사업으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밝혔다 .  

 

라 . 만덕산 대성지

만덕산성지는 전북 진안군 성수면 중길리 만덕산 남쪽 기슭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 진안은 백제 때 난진아 (難珍阿 )로 불렀다가 조선 태종 때에 이르러 진안으로 불렀습니다 . 진안군은 노령산맥이 남쪽으로 뻗어  80% 이상이 산악지역으로 형성되어 있습니다 . 그래서 전라 좌도라 불리면서 여러 문화가 산악중심으로 형성되어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

성수면은 성수산의 이름을 따서 성수면이라 했으며 만덕산 , 국사봉 , 방미산 , 성수산 , 대둔산 등이 있어 약초 재배와 버섯 채취 , 축산업이 활발합니다 . 만덕산은 진안 , 임실 , 완주 등  3 개 군의 경계에 있는 높이  762m 의 산으로 원불교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변산 봉래정사에서 정산종사가 소태산 대종사의 어디든지 가보라는 말을 받들고 길을 떠나면서부터 입니다 . 정산종사 미륵사에서 화주인 최도화를 만난 것으로 시작됩니다 .

그 후 소태산 대종사는 최도화의 주선으로 만덕산에서  3 개월을 머물고 불법연구회 창립총회 후에 다시 찾아  12 인의 제자와 함께  1 개월 여의 선을 났습니다 .이를 일러 만덕산 초선이라 한다 . 원기  15 년 임야를 매입하고 원기  17 년에 산전개간을 하며 감나무 등을 심었습니다 .

그 후 중길리 상달에 중길리 출장소의 문을 열었으나 마을과 함께 교당이 불로 전소되어 마을 교화의 꿈이 깨어지게 되었습니다 . 원기  52 년 법당 겸 숙소를 짓고 원기  58 년 양제승 교무가 부임하면서부터 만덕산 성지가 조금씩 수호와 함께 만덕산 농원으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 만덕산 훈련원과 만덕산 농원은 일과 공부를 통한 사상선과 주생품인 표고버섯을 생산하여 오다 최근 영농법인을 설립 하여 만덕산 푸른 생명 효소와 각종 자연식품을 생산하여 훈련도량과 산업 도량을 겸하고 있습니다 . 대산종사는 만덕산 성지에 대해 다음과 같은 법문을 내린 바 있습니다 .

만덕산 초선 성지는 갑자년 봄부터 열두제자에게 사실적 도덕의 훈련을 첫 시범 보이신 성지요 , 영광 성주의 몇몇 제자와 전주 진안 서울 남원 등의 인연있는 제자를 규합하시기 시작한 총부건설의 주비지 (籌備地 )인 성지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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